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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리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자크 루이 다비드

김독서 2018. 11. 1.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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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Oath of the Horatii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1783년 다비드가 

처음으로 왕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다. 

왕은 로마 역사의 한 장면을 주문했고, 다비드는 리비의

<로마사>와 <플루타크 영웅전> 등에 등장하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기원전 7세기, 로마와 이웃한 알바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었다.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양국은 전면전 대신 각각 세 명의 대표를 뽑아 

그들 사이의 결투 결과에 따라 승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가의 삼형제가, 알바에서는 

쿠리아티우스가의 삼형제가 결투에 나섰다. 그러나 

호라티우스의 한 아들은 이미 상대 집안의 딸 사비나의 

남편이었고, 호라티우스가의 딸 카밀라는 반대로 

쿠리아티우스의 아들과 혼인을 앞둔 상태였다. 

결국 어느 편이 이기든 여인들은 형제의 손에 남편을 

잃거나 약혼자를 잃게 될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 것이다. 

결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호라티우스가의 아들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아 돌아왔다. 그의 누이 카밀라는 

약혼자의 죽음을 원망하며 로마를 저주했다. 

돌아온 전사는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그 자리에서 

카밀라를 죽여버린다. 로마의 군중들은 잔인하게 누이를 

살해한 호라티우스의 아들을 비난했지만, 

아버지는 그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며 아들을 지켜냈다.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희생하고, 오직 국가를 위해 

전쟁터로 나아가는 군인이란 왕실이 미술작품을 통해 

선전하고자 하는 최고의 가치였다. 다비드가 구상한 

장면은 고전문헌 어디에도 묘사되지 않은 

순수한 그의 창작물이다

장식이라고는 전혀 없이 엄숙하고 단정한 건물 안에서, 

아버지는 세 자루의 칼을 아들들에게 쥐어준다. 

아들들은 무기를 받아들며, 적을 물리치지 못하면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겠다는 맹세를 하고 있다. 

팔을 앞으로 뻗은 당당한 삼형제는 그야말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용기와 전의로 팽배해 있다. 뻣뻣할 정도로 

곧게 편 그들의 몸과 서로를 부둥켜 안은 강인한 팔에서는 

망설임이나 두려움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반면, 차갑고 냉정하기 그지 없는 형제들 뒤에서 여인들은 

무너져내리 듯 주저앉아 있다. 공공의 선을 위해 자기를 

절제하는 남성들과 달리 사적인 감정에 빠져있는 나약한 

여성들의 대비는 초인적인 영웅심을 강조하기 위해 

다비드가 만들어낸 드라마인 것이다.




다비드는 1785년 7월, 로마에서 이 작품을 완성했고, 

그의 스튜디오에서 처음 공개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로마에 모여있던 

전 유럽인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는 순식간에 국제적인 

유명화가로 위세를 떨치게 된다. 프랑스인들은 로마로부터 

전해지는 찬사에 한껏 고조되어 이 작품이 공개될 

파리 살롱을 학수고대했다. 다비드는 예정된 날짜보다 

뒤늦게야 작품을 파리로 배송했다. 기다리다 지친 관중들은 

더욱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살롱에서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원래 약정된 가격은 4,000리브르였으나, 

다비드는 6,000리브르를 받아냈다. 중산층이 파리에서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 일년에 3,000~4,000리브르의 

수입이면 족하던 시절이다. 

참고로 소르본느 대학 교수의 연봉은 1,900리브르에 불과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모든 평론가들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찬미했다. 보수적인 이들의 

눈에 이것은 틀림없이 군주에 대한 용맹한 충성심을 

선동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이들에게는 

독재자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공화정을 위해 

도덕적인 가치를 실천하는 젊은 애국자들에 대한 찬사였다. 

루이 16세는 계몽주의적이고 도덕적인 군주로서의 이미지를 

선전하기 위해 신고전주의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러나 

이미 혁명을 꿈꾸고 있던 이들에게 계몽주의의 핵심은 

계급질서가 아니라 고귀한 인간의 정신이 이끌어가는 

공화정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진정한 영웅은 자기를 희생하고 공공의 선을 위해 

권위적인 사회구조를 타파하는 시민들이었다. 

살롱은 왕실의 정치선전을 위한 거대한 문화 이벤트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혁명 전야의 살롱 관중들은 이미 당대의 

정치 현안을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에 비추어 비판하면서, 

위로부터 전달된 메시지를 뛰어 넘어 새로운 시대를 

예견하는 열망을 읽어내고 있었다.



다비드는 대의를 위해 

사사로움을 버린 영웅과 이에 반대되는 여인들의 감정적 반응을 

<브루투스에게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바치는 릭토르 군대>

에서도 반복했다. 브루투스는 기원전 509년, 독재자를 타파하고 

로마를 공화국으로 다시 세운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이 

군주정을 회복하기 위한 반역 음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주저하지 않고 사형에 처한다. 아들들의 시신이 집으로 운구되자 

여인들은 비통함을 감추지 않고 온몸으로 슬퍼하고, 

브루투스는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에 완성된 작품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비드는 혁명을 예언했던 것일까? 

다비드에게 진정 예지력이 있었다면, 혼란에 빠진 

혁명의 기수도, 실각한 황제의 화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은 스스로 시대를 말하는 힘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 자크-루이 다비드 (서양미술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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